...   여러분들을 똑바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또 하는 거니까 놓고 들이고, 들이고 내고 하는 그 장본인이 바로 자기 알맹이, 즉 말하자면 콩깍지 속의 콩임을 분명히 아세요. 콩을 깔 때에 익지 않았으면 까기가 무척 힘들고 조금 더 익었으면 쉽게 까지듯이 그것도 공부하는 수행 과정입니다. 콩이 완전히 익었다면 콩깍지와 콩이 따로따로 떨어지는 것과 같이 우리들도 콩깍지와 콩이 따로따로 떨어져야 되는 겁니다. 공부를 해서요.   그래야만이 자유스럽게 콩이 안에서 구를 수 있습니다. 안에서 구를 수 있어야 만이 콩깍지를 벗어난 콩이란 말입니다. 콩이 벗어났기 때문에 무위로써 무심도 중용도 할 수 있는 겁니다. 들고 남도 없고 문도 없고, 벽도 없고 봇장도 없고, 물 깊이도 없고 뚫을 것도 없고, 언어도 붙지 않는다는 얘기죠.   그리고 만약에 아파서 수술을 한다고 할 때, 콩깍지와 콩이 따로 떨어져 있으면 콩은 좀 나와서 쉬어도 됩니다. 콩깍지 부스러진 것만 고치게 놔두고요.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응신으로서 일체 만물이 다 될 수 있다는 얘깁니다.   나 아님이 하나도 없다는 말씀을 하셨죠. 내 아픔 아님이 없고 내 도량 아님이 없고, 내 모습 아님이 하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만하면 이제는 껍데길 벗어도 되겠다 한다면 탁 치기만 해도 콩 껍데기는 그냥 탁 벌어져서 까질 수 있습니다. 콩 알맹이는 알맹이대로 나오는 것이죠.   우리가 진짜 공부를 할려고 칼을 뺐으면 그 칼로 인해서 일체 만물만생을 세세생생 살릴 수 있는, 건질 수 있는 칼이 돼야 되지 않겠습니까?   옛날에 어느 선비가 과거 보러 한양에 가는 길에 주막에 들러서 쉬면서, 아내가 남의 집 일을 해주고 한 푼 두 푼 모은 돈을 주머니에 넣어준 거를 생각하니까 이번에 과거에 급제를 못 하면 큰일나겠거든요.   어린 자식들과 노부모님도 그렇고 아내는 자기 공부 시키느라고 남의 집 일을 해주면서 뒷바라지를 했으니, 이번에 과거를 잘못 보면 얼굴을 들고 집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생각으로 죽을 각오를 하면서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 앉았는데, 초췌하게 차려 입은 노인 한 분이 걸어오시더니 하시는 말씀이, “자네는 어디를 가는가?” 하고 묻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한양에 과거를 보러 갑니다.”하니까 “자네 과거를 보러 가려면 이걸 보게.” 그러면서 주머니에서 뭘 꺼내더니 책을 한 권 주거든요.   그래서 주는 책을 펴보니까 백지이지 뭡니까? 백지. 그러더니 이 책을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과거를 잘 볼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아예 주고 가더랍니다. 그래서 그 백지를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아하. 이번 과거에는 이 백자가 꼭 나오겠구나.’ 하는 생각이 떠오르는 겁니다.   흰 백자는 고개를 들었고 둥글리면 둥글려졌고, 하나도 없을 수도 있고 전체가 꽉 찰 수도 있고, 꽉 차서 중심을 들어설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고 과거를 보러 갔는데, 바로 그런 대목이 나온 거예요. 그래서 과거에 급제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렵게 생각하란 얘기는 아닙니다. 항상 기억해야 하는 건 선장이라는 뿌리, 주인공이라는 뿌리입니다. 뿌리로 인해서 잎새 하나하나가 다 살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해요. 잎새라는 건 뜻으로 내 몸 속의 생명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뿌리에 달린 이 큰 덩어리는 바로 헤아릴 수 없는 생명들을 살게 하는 주머니예요. 이 중심이 꿰어져 있어서 수레와 같이 돌아가는 법륜 바퀴라고 해도 돼요.   그러니까 한 가지 잊지 말라고 하는 건 단 하나, 들이고 내는 것도 그 속에서 나오는 거고 울게 하는 것도 아프게 하는 것도 다 거기서 나온다는 것을 믿어야 됩니다. 무조건 믿고 무조건 놓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냥 ‘주인공, 알아서 해.’ 이러지 마세요. 가정에서 생활을 하시는 분들이니까 좀더 쉽게 일러주기 위해서 ‘당신이 알아서 해.’라고 하지만 실은 얼마나 간절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아픔이라든지 가난한 거든지 닥쳐오는 모든 경계들을 자기의 근본자리에 되돌려놓고 지켜보면서, 잘 되는 거는 감사하게 놓고 안 되는 거는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지켜봐야 해요. 어떤 사람은 “당신만이 할 수 있어.” 어떤 사람은 “뿌리만이 할 수 있어.” 또 어떤 사람은 “주인공만이 할 수 있다.”고 별별 이름을 다 갖다 붙인다 할지라도 한자리에서 나고 듭니다.   ... 1995년 05월 21일 법문 중에서 < 회보 90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