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리왕 9년(32년) 6부(六部)를 개정할 때 명활산 고야촌(明活山高耶村)을 습비부(習比部)로 고치고 촌장(村長) 호진(虎珍)에게는 설(薛)씨를 사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제1권 신라본기(新羅本紀).

▲ 원효대사(元曉大師)에 대한 기록이 전하는 ‘삼국유사(三國遺事)’ 제4권.

 

시조(始祖) 설거백(薛居伯ㆍ초명은 薛虎珍)은 당시 진한(辰韓) 땅이었던 지금의 경북 월성군 천북면 일대의 명활산 고야촌(明活山高耶村)을 다스리던 촌장(村長)으로 신라 제3대 유리왕 9년(서기 32년) 습비부(習比部)로 개칭되면서 다른 다섯 촌장들과 함께 각각 사성(賜姓)받은 것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한반도의 동남단(東南端)에 자리잡고 뿌리를 내린 설씨(薛氏)는 근원이 같으면서도 본관(本貫)을 달리하여, 경주 설씨(慶州薛氏)와 순창 설씨(淳昌薛氏)로 분적(分籍)되어 계대(繼代)하고 있다.

 

설씨이천년사(薛氏二千年史)’에는 최초의 본관을 14세 곡(嚳)이 경주(慶州)로 삼았는데 신라 진흥왕 때라고 하며, 고려 인종 2년(1124년) 36세 자승(子升)이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순화백(淳化伯ㆍ순화는 지금의 순천)에 봉해져 본관을 순창(淳昌)으로 바꾸었으나 귀창(貴昌)을 파조(派祖)로 하는 개성파는 원래의 경주(慶州)를 본관으로 하였다.

 

설씨는 8파(派)로 나누어져 있는데, 39세(世) 신(愼)의 두 아들인 공검(公儉)ㆍ인검(仁儉) 형제대에서 처음으로 문양공파(文良公派)와 ①문숙공파(文肅公派)로 나뉘어졌고, 그 뒤 문양공파(文良公派)는 44세(世)인 응(凝)ㆍ풍(馮) 형제대에서 암곡공파(巖谷公派)와 ②참의공파(參議公派)로 나뉘어졌다. 암곡공파(巖谷公派)는 45세(世) 훈(燻)ㆍ위(緯)ㆍ즙(緝) 3형제대에서 증옥천군파(贈玉川君派) ③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 ④진사공파(進士公派)로 나뉘어지고, 증옥천군파(贈玉川君派)는 46세(世) 효조(孝祖)ㆍ계조(繼祖)ㆍ영조(榮祖)ㆍ순조(順祖) 4형제대에서 ⑤참판공파(參判公派) ⑥옥천군파(玉川君派) ⑦군수공파(郡守公派) ⑧삼지당공파(三知堂公派)로 나눠졌다. 옛날 족보에 나오는 문간공파(文簡公派)는 옥천군파(玉川君派)이고, 목사공파(牧使公派)는 삼지당공파(三知堂公派)이다.

 

문헌에 의하면, 경주ㆍ순창 설씨(慶州ㆍ淳昌薛氏)의 상계(上系)는 경주시(慶州市)를 비롯하여 경북 월성군(月城郡) 일대에서 살았으며, 36세 자승(子升)의 대에 하동(河東)을 거쳐 전북 순창(淳昌)으로 가 정착한 이래로 오랫동안 순창(淳昌)에 세거해 오면서 조선왕조 중기부터 다시 자승(子升)의 후손들이 번창하여 경기ㆍ충청ㆍ경상ㆍ함경도로 북상(北上)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30년경 경주ㆍ순창 설씨(慶州ㆍ淳昌薛氏)의 자손들은 경기도 개풍군 서면ㆍ북면, 장단군 소남면ㆍ장단면, 고양군 중면 마두리, 광명시 가학동, 전북 순창군 금과면, 전남 진도군 지산면, 고흥군 분천리, 경남 의령군 봉수면, 밀양군 가산리, 창녕군 장마면 월명리, 의창군 북면 월백리, 충남 금산군 방우리, 충북 옥천군 청산면 덕지리, 강원도 명주군 주문진읍 향호리, 평남 평원군 일원, 함남 이원군 동면, 단천군 하다면, 함북 학성군 학성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이러한 설씨(薛氏)는 특히 신라에서 유불사상(儒彿思想)의 양대 산맥을 이루며 찬란한 업적을 이룬 사(思ㆍ원효대사)와 총(聰)의 부자가 뛰어났다.

 

설씨족보(薛氏族譜)’에 의하면 그는 아찬군(阿湌君) 이금(伊琴)의 아들로 지금의 경북 경산군 자인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조씨(趙氏)가 유성(遊星)이 품속에 드는 꿈을 꾸고 그를 배었으며, 만삭이 된 몸으로 압량군(押梁郡)의 남불지촌(南佛地村) 율곡(栗谷)마을을 지나다가 사라수(娑羅樹) 아래에 이르러 갑자기 낳았는데 그때 오색 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한다. 그는 불문(佛門)에 들어가 신라 문무왕 1년(661년) 의상(義湘)과 함께 당(唐)으로 유학하다가 밤중에 고총(古冢)에서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대오(大悟)하고 돌아와, 불교의 보급과 저술에 힘써 한국불교사상 가장 위대한 고승으로 추앙받고 있다.

 

▲ 경주시 보문동에 자리한 전홍유후설총묘(傳弘儒候薛聰墓ㆍ경북기념물 제130호).

 

그가 문무왕(文武王)의 딸 요석공주(瑤石公主)와 혼인하여 낳은 아들 총(聰)은 이두(吏讀) 문학의 창시자로 중국학문의 섭취에 커다란 업적을 남겨 ‘신라 십현(新羅十賢)’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었으며, 강수(强首)ㆍ최치원(崔致遠)과 함께 ‘신라 삼문장(新羅三文章)’으로 일컬어졌다. 벼슬은 한림(翰林)을 지냈고 왕의 자문역할을 했으며, 후에 홍유후(弘儒侯)에 추봉(追封)되었다.

 

▲ 1651년 이정(李楨)을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이 설총(薛聰)ㆍ김유신(金庾信)ㆍ최치원(崔致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경주시 서악동 서악서원(西岳書院ㆍ경북기념물 제19호).

 

이밖에 신라의 인물로 대사도(大司徒)의 벼슬을 지낸 심조(沁祚), 시중랑(侍中郞)을 지낸 균지(均之)ㆍ이순(履舜), 문장사(文章事)의 문결(文結) 등이 현세에도 그 이름을 전한다.

 

▲ 추밀원 부사(樞密院府使) 설신(薛愼)이 졸하였다는 ‘고려사(高麗史)’ 24권 고종 38년(1251년) 6월 말 기록과 시어사(侍御史)로서 몽고에 사행하였다는 ‘고려사’ 23권 고종 19년(1232년) 4월 12일 기록

▲ 가로 180㎝, 세로 54㎝ 소나무 판 2장을 상하로 연결해 만들어진 성황대신사적현판(중요민속자료 제238호).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성황대신(城皇大神)이라는 작호를 받은 설공검(薛公儉)과 대모산성의 양씨 부인을 수호신으로 모시고 해마다 단오에 성대한 제사를 지낸다는 내용이 각인되어 있다. 전남 순창군 순창읍 순창군청 소장.

 

고려조에 설씨(薛氏)를 빛낸 인물인 신(愼ㆍ?~1251)은 자는 신지(愼之)로 선계(先系)가 순창의 향리이었으며 20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고종 3년(1216년) 함풍현(咸豊縣)의 감무(監務)로 나가 치적이 드러남으로써 최충헌(崔忠獻)의 포상을 받는 등 일찍부터 뛰어난 이재(吏才)를 발휘하였다. 그뒤 식목도감 녹사(式目都監錄事)ㆍ대관승(大官丞)ㆍ추밀원 당후관(樞密院堂後官)ㆍ감찰어사(監察御史) 등을 거쳐 1227년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郎)으로 용주(龍州)에 외보(外補)되었으며 다시 병부ㆍ이부의 원외랑을 역임하고 1231년에는 내시(內侍)에 입적되었다. 몽고침입기인 고종 19년(1232년) 시어사(侍御史)로서 몽고에 사행하여 과중한 공물의 징구에 대한 고려측의 입장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해 고려에 재침략한 몽고의 살리타이(撒禮塔)에게 억류되어 몽고군 지휘부를 따라갔다가, 살리타이가 처인성(處仁城)에서 김윤후(金允侯)와 처인부곡민들에게 사살되자 비로소 방환(放還)되었다. 대부소경(大府少卿)ㆍ어사잡단(御史雜端)을 거쳐 1234년 충주부사(忠州副使), 이어 판예빈성사(判禮賓省事)ㆍ국자감 대사성(國子監大司成)ㆍ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ㆍ형부상서 등을 지냈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신(愼)의 어머니 옥천 조씨(玉川趙氏)는 유방이 4개로 여덟 아들을 낳아 그중 세 아들이 과거에 급제한 공으로 국대부인(國大夫人)에 봉해졌으며, 나머지 다섯 아들도 모두 현달하여 벼슬이 공경(公卿)에 이르러 이들 8형제가 태어난 부락을 팔등방(八登坊ㆍ현재는 순창군 팔덕면)으로 불렸다 한다.

 

신(愼)의 아들 공검(公儉ㆍ1224~1302)은 자는 상검(常儉), 호는 경재(敬齋)로 교동감무(喬洞監務)를 거쳐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가 된 뒤 고종 말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예부낭중(禮部郎中)이 되었다. 원종 12년(1271년)에 군기감(軍器監)으로 원나라에 가는 세자 심(湛ㆍ뒤의 忠烈王)을 호종한 공으로 우부승선(右副承宣)이 되었다. 충렬왕 2년(1276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공거(知貢擧) 허공(許珙)과 함께 진사(進士) 33인과 명경(明經) 1인을 뽑았다. 그뒤 좌승지(左承旨)가 되었고, 1278년에는 밀직부사(密直副使)로 금중(禁中)의 기무처리에 참여하였으며, 이듬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었다. 그뒤 감찰대부(監察大夫)ㆍ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ㆍ참리(參理)를 거쳐 찬성사(贊成事)로 치사했으나, 뒤에 중찬(中贊)이 더해져 치사하였다. 조정에서나 향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여 우러러보던 그는 1319년 충렬왕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충혜왕 2년(1341년) 순창읍 성황사에 목상을 만들어 안치한 뒤 1년에 4차례 제사를 모셔 국가적 행사로 치렀다. 성황대신사적현판(중요민속자료 제238호)에 설공검(薛公儉)을 남성 성황대신으로, 대모부인(大母夫人)을 여성 성황신으로 하여 매년 단오절에 성대한 제사를 치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시호는 문량(文良).

 

▲문량공(文良公) 설공검(薛公儉)이 졸하였다는‘고려사(高麗史)’ 32권 세가(世家) 32권 충렬왕 28년(1302년) 2월 말 기록과 충렬왕 묘정에 배향되었다는 ‘고려사’ 60권 지(志) 14권 기록.

▲‘고려사(高麗史)’ 105권 열전 18권에 기록된 문량공(文良公) 설공검(薛公儉)의 열전.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공검(公儉)의 아우 인검(仁儉)과 공검(公儉)의 아들로 충렬왕 때 정승(政丞)을 지낸 지충(之沖) 등도 이름을 날렸다.

충선왕(忠宣王) 때의 명의(名醫) 경성(景成ㆍ1237~1313)은 대대로 의업(醫業)에 종사하는 집안 출신으로 의학에 정통하여 처음에 상약의좌(尙藥醫佐)가 되었다. 내외직을 거쳐 군부총랑(軍簿摠郞)ㆍ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ㆍ첨의사사(僉議司事) 등을 역임했다. 경성(景成)은 요직에 있으면서도 본업인 의술을 등한시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의서를 곁에 두고 연구했으며, 충선왕의 아버지 충렬왕(忠烈王)의 병을 고쳐 고려 최고의 명의(名醫)라는 찬사를 들었다. 충렬왕 11년(1285년) 원나라에 불려가서 세조(世祖) 쿠빌라이와 성종(成宗)의 중병을 고쳐 주어 명의로서 이름을 떨쳤고 후대를 받았다. 세조(世祖)는 경성(景成)을 시의(侍醫)로 삼았으며, 경성(景成)은 또한 세조(世祖)의 바둑친구로서 더욱 두터운 신임을 받아 오랜 기간 동안 원나라에 살다가 노년이 되어서 고려로 돌아왔다. 고려에 돌아온 그는 찬성사(贊成事)라는 벼슬을 끝으로 퇴직하였으며, 신체가 장대하고 풍의(風儀)가 아름답고 천성이 근후하며 제왕에게도 은혜를 구하지 않았다.

 

▲ ‘고려사(高麗史)’ 122권 열전 35권에 기록된 설경성(薛景成) 열전.

 

인종(仁宗) 때의 36세손 자승(子升)은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옥천백(玉川伯ㆍ옥천은 지금의 전북 순창)에 봉해진 이후 이곳에 설문(薛門)의 세를 떨치면서 경주본관(慶州本貫)에서 개관(改貫), 오늘의 순창 설씨(淳昌薛氏)의 중시조(中始祖)가 된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참지문하성사(參知門下省事)를 지낸 응(凝)은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짐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고향인 순창(淳昌)으로 숨어버렸다고 고려 충신 두문동칠십이현(高麗忠臣杜門洞七十二賢)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조에 들어서는 태종(太宗) 때 경주부윤(慶州府尹)ㆍ직제학(直提學)을 지내고 명나라에 다녀온 칭(偁), 세종 때 대사성(大司成)에 오른 위(緯)가 있다. 특히 위(緯)는 자는 중민(仲敏), 호는 백정(栢亭), 조선 때 진사(進士)로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만경현령(萬頃縣令)으로 있을 때 청렴정직하여 여러 차례 탐관오리들의 탄핵을 받자 벼슬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유명한 백정시(栢亭詩)를 남겼고 청백리(淸白吏)에 기록되었다.

 

▲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 설계조(薛繼祖) 영정과 추충정난공신(推忠靖扈亂聖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는

단종실록 13권 3년(1455년) 1월 24일조 기록.

 

또한 세조(世祖) 때 안무사(按撫使)를 지낸 효조(孝祖)는 아들인 담양부사(潭陽府使) 성(成)과 함께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에 올랐고, 단종(端宗) 1년(1453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쿠데타에 공을 세워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봉해진 계조(繼祖), 계조(繼祖)의 동생으로 김해부사(金海府使)와 상주목사(尙州牧使)를 거쳐 좌익공신(佐翼功臣)에 추대된 순조(順祖)가 문중을 빛낸 인물들이다. 당상관(堂上官)에 오른 이들 3형제 5부자가 모두 전북 순창군 금과면 모정리(茅亭里) 출신으로 유명하다.

 

▲ 1910년 국권강탈을 당하자 남파(南坡) 설진영(薛鎭永)이 아미산(峨嵋山) 남쪽 기슭에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을 위해 세운 전북 고창군 금과면 동전리 설진영서실(書室ㆍ전북도기념물 제96호)

 

한말(韓末) 어지러운 풍운 속에서 태어나 일제(日帝)에 항거한 진영(鎭永ㆍ1869∼1940)은 초명은 진삼(鎭三), 자는 도홍(道弘), 호는 남파(南坡)ㆍ율재(栗齋)로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고광선(高光善)ㆍ박인섭(朴寅燮) 등과 교유하였다. 고종 32년(1895년) 민비(閔妃)가 시해되자 스승 기우만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장성ㆍ나주 등지에서 왜병과 싸웠다. 1910년 국권강탈을 당하자 망국의 한(恨)에 ‘왜(倭)와 오랑캐와는 상대할 수 없다’며 아미산(峨嵋山) 남쪽 기슭에 남파서실(南坡書室)을 짓고 두문불출하면서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심혈을 경주하여 많은 영재를 배출하였다. 1940년 일제가 조선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이를 거부하여 맹세코 성을 고치지 않겠다는 절명시(絶命詩) 2절과 유서를 남기고 우물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그의 어머니 탐진 최씨(耽津崔氏)도 한일합방 후 일본 관리가 일본천왕이 내린 은사금(恩賜金)이란 명목으로 금일봉을 주자, 큰소리로 꾸짖어 보낸 위엄있고 지조가 정결한 분이었다. 그 어머니의 그 아들이라 불리고 있으며, 절행(節行)을 표한 비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