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명 : 순창(淳昌)

 성씨명 : 설씨(薛氏)

 본관소재지 : 전라북도(全羅北道) 순창군(淳昌郡)

 본관이칭 : 경주설씨(慶州薛氏)

 시조명 : 설거백(薛居伯: 薛虎珍)

 

시조는 설호진(薛虎珍), 혹은 거백(居伯)이라고도 했다. 경주 금강산에 내려와 습비부(習比部) 설씨의 조상이 되었다. 설거백(薛居伯: 薛虎珍)은 신라가 생기기 이전인 BC 57년 박혁거세의 탄생설화에 나오는 개국공신(開國功臣) 6부 촌장 중 한사람이다. 진한(辰韓) 땅이었던 명활산 고야촌(明活山 高耶村: 지금 경상북도 경주시 천북면)의 촌장으로 나머지 5촌장과 함께 박혁거세를 신라 초대왕으로 추대하고 32년(유리왕 9)에 6촌이 6부로 개칭되면서 명활산 고야촌도 습비부(習比部)로 고쳐 불렀고 성도 설씨를 하사받았다. 그 후 516년(법흥왕 3) 무신공(武信公)으로 시호(諡號)되었고, 무열왕 때에 장무왕(壯武王)으로 추봉되었다. 설씨는 설거백을 시조로 받들고 경주를 본관으로 세계를 이어오다가 36세손 설자승(薛子升)이 1124년(고려 인종 2) 예부시랑(禮部時郞)으로 순화백(淳和伯: 지금 순창)에 봉해지자 본관을 순창으로 이관하였다. 설귀창을 파조로 하는 개성파는 원래의 경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결국 경주가 원적이 되고, 순창이 본적이 된다.)

 

같은 성씨라 하더라도 계통이 달라, 근본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웠으므로 동족여부를 가리기 위해 필연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 본관(本貫)이다. 본관이란 본(本) 관향(貫鄕)또는 관(貫)이라고도 하는데, 원래 관은 돈(錢)을 말하는 것으로 돈을 한줄에 꿰어 묶어가지고 다니는 것과 같이 친족이란 서로 관련성을 갖고 있다는 뜻(貫錢見之貫)이며,여기에 더 나아가 본적이란 뜻(本貫鄕籍也)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시조나 중시조의 출신지 혹은 정착 세거지(世居地)를 근거로 호칭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봉군(封君:고려때 종1품, 조선때 2품이상의 공로자에게 주는 작위)칭호에따라 정하는 경우, 그리고 성씨와같이 임금이 공신이나 귀화인에게 특별히 하사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사성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우리나라 에서는 같은 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동족부락이 있었는데, 이들 은 문벌을 소중히 여기고 자치적으로 상호협력하여 집안일을 해결해 나가는 특이한 사회 조직의 한 형태를 이룬다. 수많은 본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분파를 지양하고 한 종족의 핏줄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동족동본의 의식으로 오천년 역사를 이끌어온 원동력이 되었다.

 

한국사회의 본관을 살펴보면 처음 본관을 수백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고 중간에 본관이 갈리어 분관(分貫)된 성씨가 있고 이관(移貫) 개관(改貫)하였다는데 우리 설씨의 경우는 후자인 개관에 속한다.

 

 

시조 무신공(武信公)께서는 박혁거세 탄생설화에 나오는 초기 신라의 6촌중 명활산고야촌의 촌장 이셨다. 시조공께서 좌명 공신으로 박혁거세가 왕이 된 뒤에 좌거 1대등공신 대사마 겸 대원수 개국도임관 대보 좌명공신 총재태재태사 보국천 좌보승보의 벼슬에 오르시어 군부와 내치의 업무를 장악하셨으며 서기 32년에 고야촌 설씨로 사성받아 서기 516년에 무신으로 시호가 내려지고 서기 656년에 장무왕(壯武王)으로 추봉되셨으니 시조의 탄생지가 본관이라면 당연히 고야촌 설씨나 혹은 계림,월성이라야 옳으나 기사보에 의하면 시조공으로부터 14세손휘(諱) 곡 때 515년경 본관을 경주설씨로 하게 되었다는 기록은 450여년을 소급하여 표시한 것 같다. 경주라는 지명은 935년 신라가 폐망하고 처음으로 생겼다.

 

서라벌 → 사로 → 사라 → 계림(65) → 신 라(307) → 경주(935) → 동경(987) → 낙랑군(1008) → 다시동경(1030) → 고려충렬왕때 계림부 → 조선태종때(1413) 경주지명부활 → 경주군(1895) → 경주시 승격(1955)

 

이상과 같이 경주 지명 변천사를 볼때 이땅에 경주 지명이 있기전에 우리 설씨는 서기515년 경에 경주 본관을 기록했다함은 후학들에게 의심스러울 일이나 실은 신라 시대에 본관제도가 통용되지 않았다.

서기 1047년 고려 문종때 과거제도가 발달하면서 신분 파악을 위해 귀족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성씨와 본관을 기록하게 되었으며 특히 조선의 문예부흥시대라 할 수 있는 영·정조때 서기 17세기에 우리나라 성씨의 80%이상이 족보를 간행하게 되어 소급해서 서기 515년경부터 경주 설씨가 기록하게 되었다고 본다.

 

 

신라 6부장중 습비부장 무신공 설호진을 시조로 받들고 14세손 설곡 선조때 경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다가 36세손 설자승(子升)선조께서 고려 인종 을사(1125) 이자겸의 난을 피하여 예부시랑의 벼슬을 사직하고 경남 하동군에 소재한 목화산에 잠시 우거하시다가 처향(妻鄕)인 순창군구림면율북리에 정착하셨다. 후일 증손자 설신(愼)께서 추밀원부사, 형부상서 순화백(淳化伯:순창의 옛지명)에 봉작되시고 현손 설공검(公儉)께서 도첨의 중찬의 최고 관직을 봉직하여 문량(文良)의 시호를 받아 종묘(宗廟:고려 역대왕과 덕망높은 신하의 위패를 모신 곳-개성에 있음)배향공신이 되시니 설자승선조를 추존하여 순화백에 봉작하고 순창설씨로 본관을 개관하게 되었다.

 

순창설씨로 처음 기록된 문헌은 1251년 설신께서 서거하실때 부장품으로 묘에 같이 묻었던 묘지석(墓誌石:현국립중앙박물관소장)이고 다음은 고려사 열전의 설공검편에 순창설씨라되었으며 조선 태조 1년(1392) 간행한 국조문과방목(문과급제한 명단)과 문화류씨 가정보(1480.1570) 궁원록(窮源錄:1600).씨족원류(氏族源流:1640).기사보(1749)의 서문에 경주 본관을 순창으로 개관하였으니 경주나 순창으로 본관을 받드는 종족은 순화백의 자손이라고 되어 있다. 개관 경위를 예측하면 고려 태조 18년 신라 경순왕이 항복하자 나라는 없어지고 경주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등장하였다가. 고려 현종때 신라 복귀의 반란이 일어나 경주를 해체하여 안동과 상주에 예속시켜 사실상 경주라는 지명이 없어지게 되었다가 조선 태종때(1413) 경주란 옛이름이 부활하게 되었다는 역사적 근거로 미루어보아 문량공 순화백선조 시대에 시대 변천에따라 본관을 개관하지 않았는가 짐작해 본다.

 

 

경상북도 남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기원전 57년 이곳에 6촌이 연합하여 고대국가를 형성, 국호를 서라벌(徐羅伐).사로(斯盧).사라(斯羅)로 하고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하였으나 수도명과 국명을 동일시하였다.

 

탈해왕 9년(65) 시림(始林)에서 김씨의 시조가 탄생하여 국호를 계림(鷄林)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나 별칭으로 사용하였으며 기림왕 10년(307)에 최초로 국호를 신라로 하였고, 고려 태조 18년(935)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손위하자 처음으로 경주(慶州)라는 명칭이 생겼다. 성종 6년(987) 동경으로 개칭하고 목종 11년(1008) 별칭으로 낙랑군이라 하다가 현종 21년(1030) 삼경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을 설치하고 충렬왕때 계림부로 개칭하엮다.

 

태종 13년(1413) 계림부를 경주부로 개칭하고 여러차례 변천을 거쳐 경주군(1895), 경주시(1955)로 승격되었다.

※ 경주 본관 성씨 - 박, 석, 김, 이, 최, 손, 정, 배, 설, 강, 양

                           (朴, 昔, 金, 李, 崔, 孫, 鄭, 裵, 薛, 康, 楊)

 

 

순창은 삼한시대에는 마한(馬韓)땅이었고 백제때에는 도실군(道實郡) 일명 오산(烏山)이라고 불렀으며 통일신라시대엔 순화(淳化)라 했다. 고려 명종 5년(1175)순창현이 감무관으로서 수령관으로 독립하여 충숙왕 1년(1314) 순창군으로 승격일명 옥천(玉川)이라고도 하였다. 조선 태종 9년(1409)적성현 복흥현 치등소 유등촌소를 순창으로 합병하였다. 세조 12년(1466)지군사에서 군수로 바뀌고 고종 32년(1895)남원부에서 전라북도에 속하였으며1979.7.1순창읍(淳昌邑)으로 승격하였다.

현재 1읍 10면 131리이고 본관을 삼은 성씨는 설 염 임 조 옹(薛 廉 林 趙 邕) 다섯 성씨이다.

 

 

- 1985년 : 순창 24,181명, 경주 7,689명

- 2000년 : 순창 27,926명 (8,607가구), 경주 6,060명(1,879가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