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대사·요석공주의 무애(無碍)와 화쟁(和諍)을 생각하며
촘촘한 그물코 통하는 바람의 몸짓처럼 진리 향해 거침없어라
원효대사·요석공주의 무애(無碍)와 화쟁(和諍)을 생각하며
(소설가 한승원 월간중앙 2월호)
이 세상 어디에서도 생시에는 만나볼 길 업소, 꿈에서나 만나보고는 하는 사랑하는 당신, 아시아의 큰 바다 한복판에서 일어난 지진해일로 말미암아 40만 명에 가까운 사람이 소멸하였을 거라는, 넋이 흩어질 것 같은 소식을 들으면서 이 글을 씁니다.
음음한 숲 그림자 속에 숨은 채 달을 쳐다보는 마음으로 그리워해야 하는 당신, 간사하고 이기적인 것이 사람이라, 그렇듯 넋이 얼얼한 가운데에서도 지진 심하지 않은 이 땅에서 살아 숨쉬고 있음을 다행스러워 하면서 끼니마다 '마주앙' 한두 잔씩 마시면서 장자의 양생을 즐깁니다. 돼지처럼 살찌자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한 건강하고, 건강한 채 글을 좀더 잘 써 보자는 수작입니다.
얼마 전부터 원효에 빠져 있습니다. 사실은 원효가 내게 와서 빠졌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원효와 한승원이 서로의 내부를 깊이 들락거립니다. 말하자면 원효 깊이 읽기를 하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에 원효의 삶을 기록한 고려시대의 일연스님과 <원효대사>라는 소설을 쓴 일제 말기의 이광수는 원효에 대해 중대한 오독을 했습니다. 원효의 저술이나 그에 대한 모든 기록을 읽어 보면, 그가 김춘추와 김유신에게 전쟁을 중단하라고 시위를 벌인 것인데, 그들은 그것을 발견해 내지 못했습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남자는 여자로 인해 비로소 완성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갈빗대 하나를 창조주에게 빼앗김으로써 늘 속앓이를 하던 남자(아담)는 그 갈빗대로 만들어진 여자(이브)를 만남으로써 완성된다는 것이겠지요.
원효를 읽으면서 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원효는 요석공주로 말미암아 완성됩니다. 분황사에서 '화엄경 풀이'를 저술하던 원효는 김춘추와 김유신 등이 벌이는 삼국전쟁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려고 떨쳐 나섰습니다.
시장바닥의 떠돌이 광대들과 거지들과 전쟁 반대 세력들과 어울려 무애춤을 추면서 "하늘이 무너지려 한다. 하늘 떠 받칠 기둥 깎을 도끼에는 자루가 빠져 버리고 없다. 그 도끼를 주면 내가 자루가 되어 기둥을 깎아 하늘을 떠받치겠다"하고 소리쳐 노래합니다.
당대의 민중들이 원효에게 얼마나 열화 같은 박수를 보냈겠습니까? 모두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키는 전쟁을 성스러운 전쟁이라고 미친 듯이 떠들어댈 때 원효는 부르짖었습니다.
"백제와 고구려가 있기 때문에 신라는 대국의 마수로부터 안전할 수 있다. 백제·고구려가 없어지면 대국은 신라를 한입에 삼키려 들 것이다. 우리 3국은 전쟁하지 말고 불국토로서 화합되어야 한다."
요즘으로 치면 전쟁을 위한 비상사태가 선포된 그때 그렇게 전쟁을 반대하고 나선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행위였습니다. 여기가 원효의 무애와 화쟁을 확실히 읽을 수 잇는 대목입니다. 무애는 우리말로 '걸림 없음'입니다.
그것은 촘촘한 그물코들 사이를 빠져나가는 바람의 몸짓하고 같습니다.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데 걸리는 것이 없음을 말합니다.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길에는 목숨도 죽음도 사랑도 부모형제도 돈도 명예도 걸리적거리는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한데 요즘 세상에서는 원효의 무애가 '막된 생각'으로 오해받고 잇어 매우 슬픕니다).
검소하되 인색하지 않고, 소탈하되 천박하지 말고…
사람들은 진리 하나를 두고 붉은 것이라고 우기고, 푸른뎅뎅한 것이라고 우기고, 노란것이라고 우깁니다. 원효의 화쟁은 그 둘을 다 수용해 화합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둘일 수 없으므로 옳지 않은 것을 없애고 바른 진리 하나만으로 화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효의 그 화쟁은 나아가 '쇠붙이들이 서로 부딪쳐 젱그렁거리는 소리 나는 것을 멈추게 하는 화쟁(和諍)'으로 읽히고, '전쟁을 멈추게 하는 화쟁(和諍)'으로도 읽힙니다.
당대의 전쟁을 주도하던 강경세력은 전쟁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원효를 죽이려고 했는데, 천하에 우뚝 선 원효를 짝사랑해온 과부 요석이 아버지 김춘추에게 원효를 살려달라고 조르고, 김춘추는 원효를 요석궁에 연금함으로써 두 마리토끼를 다 잡습니다.
김춘추·김유신의 무리는 원효스님을, 통일 성전에 참여했다 죽은 용사의 미망인인 과부 요석공주를 범한 파렴치한 승려로 소문내버림과 동시에 시위 군중을 때려잡았습니다.
원효는 3국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연금당하는 것이고, 요석궁에 갇힌 채 저술 활동을 계속했고, 원효와 요석 사이에는 설총이 태어납니다. 원효는 파계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거추장스러운 승려 옷을 벗어 던진 것입니다.
미당 서정주의 시방식으로 읽는다면, 요석공주는 연꽃이고 원효는 연꽃을 다녀가는 바람이었을까요? 그러나 단순한 바람만은 아니고 바람 이상의 어떤 것이었습니다. 의상스님을 깊이 읽어 보아도, 남자는 여자로 인해 비로소 완성된다는 말은 성립됩니다.
원효스님은 대단한 문장가였습니다. 사람의 성품과 문장의 모양새는 비슷합니다. 거연하고 대범하되 교만하지 않고 하심과 욕됨을 참아내는 자세로 중생을 대하고 검소하되 인색하지 않고, 섬세하되 조잡하거나 옹졸하지 않고, 소탈하되 천박하지 않고, 유창하되 약장수처럼 떠벌리거나 너스레를 떨지 않고, 화쟁을 말하되 두루뭉실하지 않고 반드시 진리 하나를 도출하듯 문장 또한 그렇게 썼습니다. 그의 방법을 따라 이렇게 쓰려고 애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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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