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말 설균태 대종회장님께서 강남 한정식집에서 가진 청년회 저녁모임에서 뜻밖의 제의를 하셨다.
손수 준비하신 고창 복분자에다 소주 폭탄주까지 몇순배 돌아 회장님은 물론 동석한 청년회 멤버 10여명이 모두 얼큰하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바쁜 스케줄에도 짬을 내 '스페셜 게스트(Special Guest)'로 참석해준 '종친의 얼굴' 탤런트 설수진씨(63世)까지 자청에서 술잔을 돌리다 보니 흥이 한껏 고조됐다.
저녁자리가 파할 즈음 회장님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뜬금없이(?) 저를 지목하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
"기자란 직업이 발도 넓고 자네 성격도 활달해 보이니 종친회 청년회장 겸 홍보간사 자리를 맡아줄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사전에 귀뜸해 주신적도 없고 청년회에서도 막내격인지라 일순간 적잖이 당황했다. 청년회장이 뭘해야 하는 자리인지 평소 깊이 생각해 본적도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미처 앞뒤 살필 겨를도 없이 불과 30초 후에 수락멘트를 날리고 말았다. "능력도 자격도 부족하지만 앞으로 딱 1년간은 성심을 다해 열심히 한번 뛰어 보겠느라"고.
직전까지 청년회장을 맡아 고생해 오신 설문식 기획재정부 국장께서 "이젠 좀 더 젊고 활달하게 뛰어다닐 사람이 청년회장을 맡는게 좋겠다"고 추인 멘트까지 날리는 바람에 도저히 고사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얼떨결에 맡은 과분한 자리지만 청년회나 종친회를 위해 나름대로 하고 싶은 역할은 있다.
지난달 대종회 전국 대의원총회 자리에서도 밝혔듯 "젊고 참신한 사람들을 좀 더 많이 끌어모아 팔팔하고 생기넘치는 종친회로 만들고 싶다"는 게 바로 그것이다.
'국민 가수'라는 칭호가 전혀 부끄럽지 않은 인기 가수 설운도씨에게 "우리 성(姓)씨 명예를 드높인 공로로 이참에 명예 순창설씨 인증패를 주자"고 종친회장님께 제안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설운도씨는 대의원총회에서 감사패를 받은뒤 "비록 이(李)씨로 태어났지만 가수로선 설씨로 살았다"며 "명문가의 성을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나중에 물어보니 지금까진 '雪雲道'라는 예명을 사용해 왔지만 앞으로는 가급적 '薛雲道'로 쓰겠다는 뜻도 밝혔다.
어렵사리 전화번호를 찾아내 첫 접촉했을 때부터 그는 "경주.순창 설씨가 신라시대부터 내려온 빼대 있는 집안으로 알고 있다. 종친회에 기꺼히 참석하겠다"며 흔쾌히 수락했다.
자매가 나란히 미스코리아에 선발돼 '미녀 집안'으로 화제에 오른 설수진씨 역시 첫 통화부터 "그런 모임이 있었어요. 왜 진작 좀 불러주시지 않고..."라며 반색했다. 설수진씨는 '앞으로 설씨 홍보대사를 맡아 각종 행사나 종친회보를 환하게 빛내달라'는 회장님 요청도 선뜻 받아들였다.
그러고선 대의원총회에서 특유의 밝은 미소와 함께 수상자에게 꽃다발을 전달하고 유창한 말솜씨까지 뽐내 다소 지루해 보일지도 모를 종친회장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총회가 끝난뒤 몇몇 분이 "역대 최고의 종친회장이었다"며 어깨를 다독여 주셨을 때는 내심 뿌듯함을 느꼈다.
종친출신 유명 한국무용가인 설정애씨는 즉석에서 "내년 총회땐 부채춤 공연같은 이벤트까지 곁들이면 어떻겠느냐"는 아이디어까지 내주셨다. 회장님 등 어르신들과 천천히 상의해 봐야겠지만 충분히 고려해 볼만한 제안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지방촬영 스케줄 때문에 이번에 참석하지 못한 인기배우 설경구씨, 월드컵 4강신화의 주역중 한명인 축구선수 설기현씨 등도 가급적 내년 종친회에는 꼭 모시려고 한다.
물론 청년회장이 해야할 소임이 종친출신 인기스타들을 끌어 모으는 수준에 그쳐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일부 어르신들은 "명문가(家) 종친회가 너무 가벼워 지는 것 아니냐"며 염려를 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한 소신 하나는 갖고 있다. 저는 물론 그동안 만나본 종친출신 고위 공직자 기업가 법조인 정치인 언론인 등 유명 인사들은 물론 시골 촌로들까지 설씨로 태어난데 대해 한결같이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문제는 숱한 왕비나 재상을 탄생시킨 파평 윤씨,풍양 조씨 등 다른 명문가에 비해 결속력이 너무 떨어진 점이다. 설씨의 공통분모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청렴결백하고 불의에 굽히지 않는 선비의 기상은 지녔으되, 나서기를 싫어하고 사조직같은 걸 만들기를 꺼려한다'는 것 쯤 될 것 같다.
매일경제신문에 입사한지 만 16년째가 된 기자도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사관(史官)으로 남고 있다'는 좌우명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아왔다.
운이 좋아서인지 그동안 재정경제부 금융감독위원회 건설교통부 등 핵심 경제부처를 두루 출입했고, 지난 대선땐 한나라당 팀장을 거쳐 MB정부 첫 청와대 출입기자도 지냈다. 지금은 증권부 차석인 수석차장을 맡아 '독자들 지갑을 어떻게 하면 두둑하게 불려줄수 있을까'를 고심하고 있다.
기자는 요즘 가까운 지인들을 만날 때마다 이런 얘기를 한다. "그동안 기자생활 15년반 동안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나'를 취재해왔어요. 하지만 최근 6개월간은 '도대체 그 일을 누가 했나'를 집중적으로 파고 들고 있어요"
'무슨 일'에 매달리다 보면 사건의 본질에 10% 정도 밖에 근접할수 없지만 '누구'인지를 알고 나면 적어도 20~30%는 파악할수 있다는 점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해서 요즘은 바쁜 와중에도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고 허물없는 대화를 나누는데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
청년회장이라는 중책을 선뜻 맡기로 한 데는 이런 기자관(觀)도 조금은 작용했다. 요즘 각계에서 활동중인 여러 종친들을 만나 그분들의 삶과 가치에 대한 얘기를 듣고 의견을 교환하는데서 무엇보다 큰 보람을 느낀다.
최근에는 재계에서 간판급 종친으로 꼽히는 설원봉 대한제당 회장님을 찾아뵀다. 연세대 동문인 설현천 청년회간사가 어렵사리 자리를 마련해 주셨고, 옛 정보통신부 출신 1급 간부인 설정선 방송통신위원회 실장님도 바쁘신 중에도 기꺼이 시간을 내 주셨다.
이 자리에서 설원봉 회장님은 "아직 형님이 계시니 종친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어려운 입장을 이해해 달라"며 "청년회같은 소모임에는 수시로 참석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작고하신 설원량 전 대한전선 회장님의 부인 양귀애 명예회장님도 조만간 기회가 닿는대로 찾아뵙고 종친회에 좀더 관심을 기울여 주실것을 당부드릴 생각이다.
종친회하면 '갓쓴 어르신들'부터 먼저 떠올릴 정도로 젊은 사람들에겐 다소 생소한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저 같은 성씨를 물려받은 사람들이 좋은 장소에 모여서 따뜻한 정(情)을 나눌수 있는 자리' 정도로 문턱을 확 낮췄으면 하는 바램이다.
청년회장 겸 홍보간사는 각계각층에서 활동중인 종친들을 끌어모으고 네트워크를 만드는 '메신저' 내지 '접착제' 구실을 제대로 한번 해볼 생각이다.
